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쿠가와 이에츠나 (문단 편집) == 생애 == [[1651년]]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만 48세로 사망하자 불과 11세의 나이에 [[쇼군]]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어린 이에츠나가 쇼군직을 제수받음으로 인해 [[쇼군]]은 [[도쿠가와]] 가문이 대대로 계승한다는 원칙이 천명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에츠나가 불과 11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에츠나의 치세 초기에는 1651년(케이안[*慶安 [[고코묘 덴노]](後光明 天皇) 시절 연호이다.] 4年) [[막부]] 타도를 외친 유이 쇼세츠(由比正雪, 1605 ~ 1651) 등이 일으킨 '케이안의 변' 등으로 정정 불안이 있었다. 그러나 숙부인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 3대 쇼군 이에미츠의 이복 동생으로 공처가였던 할아버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숨겨둔 자식이었는데, 이복 형인 이에미츠가 신임하여 중용했다. 생몰은 1611 ~ 1673][* 참고로 호시나 가문은 [[다케다 신겐]]과 관련된 가문이었다], 이에미츠의 신하였던 사카이 타다노부, [[마츠다이라 노부츠나]] 등 소위 "칸에이의 유로(寛永之遺老)"라 불리는 명신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정정 불안을 해소하고 이후 29년여동안 치세는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에츠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래로 내려오던 힘으로 누르는 정치에서 벗어나서 이에야스가 [[다이묘]]들을 억누르던 정책을 일부 완화했다. [[다이묘]]가 갑작스럽게 사고 등으로 사망할 때 후계자가 없을 경우, 급하게 양자를 세울 수 있었던 <말기양자(末期養子) 제도>를 이에야스는 금지했으나 이에츠나는 이를 풀어주었다. 이로 인해 각 [[다이묘]]들은 후계자 계승에 안정을 기할 수 있었고, 갑작스런 주군의 죽음에 따른 영지의 몰수와 가신들이 낭인으로 떨어지는 것을 줄여주었다. 또한 주군이 죽었을 때 가신들이 자결하는 [[순사#s-2.2|순사]]를 금하는 <순사금지령>을 강화하는 등 문치정치를 추구했다.[* 여담으로 낭인의 경우 에도 막부의 큰 사회문제가 되었고 순사의 경우에는 '''순사자가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미 막부의 공식 금지령이 떨어지기 전에 자체적으로 금지한 번도 있었을 정도.] 치세 후기로 접어들면서부턴 이에츠나를 보좌하던 명신들이 하나둘씩 사망하거나 고령으로 은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츠나는 쇼군이 단독으로 의사를 결정하지 않고 대로들과 함께 상의하여 결정하는 방식의 정치를 정착시켰다. 또한 선대 이에미츠 시절에도 연결되는 '''칸에이 대기근'''의 교훈을 상기하여 기근 대책으로 농업을 중심에 두고 유통경제의 활성화에도 주력했다. 다만 말년까지 후계자가 없어 고심해야 했다. 정실인 [[후시미노미야]] 아키코 여왕(顕子女王, 1640 ~ 1676)에게선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고, 측실[* 아이가 없는게 워낙 고민이었는지 후시미노미야측에서 직접 측실을 추천할 지경이었다고 한다.]이 임신을 해도 사산되거나 유산되는 불행이 있었다. 결국엔 이에츠나가 [[1680년]] 병으로 위독한 상황에 처하자, 배다른 막내 동생인 타테바야시 번주 마츠다이라 츠나요시를 양자로 맞아서 후계자로 삼았으니, 그가 바로 이른바 '''[[개]] 쇼군'''(...)으로 불리기도 하는 [[도쿠가와 츠나요시]]였다. 그리고 이후 이에츠나는 40세(만 38세)의 젊다면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